이전 직장에서 제주도 출장을 종종 갔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찾아오는 꿀 같은 자유시간. 이때부터는 나만의 작은 여행이 시작된다. 사실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거창할 건 없다. 맥주 한 캔을 사 들고 숙소 앞 제주 바다 앞으로 거니는 게 전부다.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참을 걸었다.
노을은 금세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나는 돌계단 두 번째 칸에 걸터앉아 남은 맥주를 홀짝였다. 핸드폰은 주머니 속에 고이 넣고, 그야말로 멍을 때려본다. 무표정과 시선 처리는 멍- 이지만 머릿속은 복잡계다. 커리어, 인간관계 등 다양한 고민과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던 중 친구 녀석이 하나 생각났다. 자주 연락하지는 않지만, 이따금 뜬금없이 전화하는 친구였다. 문자 메신저보다도 통화가 편하다는 그는 맥락 없이 연락 와서 내 근황을 묻곤 했다. 이참에 나도 한 번 뜬금없이 해봐야겠다. 그 녀석에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명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제주도에 왔는데 생각나서 연락해 봤다고 말했다. 정말 오래간만의 연락이었는데 한 참 시시콜콜 이야기했다. 친구는 친구다. 수다 좀 떨었다고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다. 다시 먼 바다를 바라본다. 이내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장에 적었다.
1)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지 않기 2)작은 목표를 하나씩 성취해 가며 기쁨 느끼기 3)소중한 사람들에게 자주 연락하기 … 바닷바람에 걱정을 하나 둘 증발 시켰다. 안개가 거치듯 불안한 마음이 정돈되고 있었다. 짧고 굵은, 나만의 작은 여행이 이렇게 깨달음을 주는 건가. 어디로 가든, 낯선 풍경 앞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여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제주에서 돌아온 몇 달 뒤, 통화했던 친구녀석이 갑작스런 소개팅을 시켜줬다. 별생각 없이 나갔는데 뜻깊은 인연으로 돌아왔다. 이게 다 나만의 작은, 제주 여행 덕분인 것만 같다. 이렇게나 운이 좋은 나인데 그땐 뭘 그리도 걱정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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