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의 세 고사를 찾아서 - 흥법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
Travel Overview
Gangwon-do · Wonju

거돈사지

옛 절터에서 떠나는

천 년의 시간 여행

발길 닿는대로 떠나는 여행에는 화려한 명승지보다 여백으로 가득한 곳이 더 끌린다. 헛헛한 마음을 흐르는 물에 떠내려 보내도 좋고, 숱한 세월 너머 어딘가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결에 실어 보내도 좋으리라. 결국 발길이 닿은 곳은 산과 들, 물과 길이 고요히 교차하는 원주의 오래된 옛 절터다. 남한강이 우회하는 원주 지역에는 유서 깊은 절터가 많다.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폐사지(廢寺址)는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다. 모두 신라 말기에 창건해 번영을 누리다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사라진 옛 사찰터로 모두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과 스승 진공대사의 이야기, 흥법사지

유유히 흐르는 섬강을 앞에 두고 자리한 흥법사지(興法寺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 밭 한 가운데 남아 있는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64호)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흥법사는 신라 때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곳에는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제365호)이 있었는데,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진공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으로 왕사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태조 왕건이 직접 지은 글이 탑비에 남아 있는데, 흥법사 건립 취지와 진공대사를 위한 예찬이 담겨 있다.

현재 흥법사지에는 탑비를 받들었던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와 삼층석탑만이 만이 옛 터를 지키며 천년의 시간을 잇고 있다.

장소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고려시대 지광국사의 얼이 깃든 법천사지

헤집어 놓은 흙과 돌부리, 아름드리 노거수가 제각각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지만, 거대했던 규모가 느껴지는 광활함에 괜스레 마음부터 스산해진다.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위치한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法泉寺址)는 약 18만 제곱미터(5만여 평)의 거대한 건물 터만으로도 옛 규모를 짐작케 하는 장엄함이 있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진 뒤 폐사되었다고 한다.

부처님 말씀이 샘처럼 솟는 곳, 법천사는 고려 문종 때 국사였던 지광국사 혜린이 젊은 시절 승려의 길로 들어선 곳이자 입적한 곳으로, 고려시대에 법상종의 중심 사찰로 ‘법천리’라는 마을 전체가 사찰로 불리웠을 정도로 크게 번창했다. 문종이 지광국사의 공적을 적어놓은 국보 제59호 지광국사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와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호), 당간지주(강원도문화재자료제20호) 등이 남아 나라의 정신적 지주였던 지광국사를 기리고 있다. 고려 시대의 뛰어난 석조미술 양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지광국사의 얼이 깃든 법천사지는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융성했던 시절, 빈 터를 가득 채웠던 전각들과 불상, 사람들의 모습을 소리없이 전하고 있다.

장소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산70-1│전화 033-733-1330

노거수가 지켜 온 천년 세월, 거돈사지

법천사지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또다른 폐사지가 있다. 현계산 기슭 조용한 시골마을로 들어서자 네모반듯한 대지가 넓게 펼쳐진다.

석축을 뚫고 서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텅 빈 절터를 지키는 사적 제168호 거돈사지(居頓寺址). 거돈사는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 보수되고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현재 약 5만8,000m2(7,500여 평)의 텅 빈 절터에 거돈사지 삼층석탑(보물 750호)과 원공국사탑비(보물 제78호)가 있다. 또한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탑(보물 제190호)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모조품만 남겨져 있다. 금당지에는 2m가 넘는 거대한 화강암 불좌대가 남아 거대했던 고찰의 옛 영화를 증명한다.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는 둘레가 7미터를 훌쩍 넘는다.

거돈사의 영화와 쇠락을 모두 지켜봤을 노거수의 시간을 따라 고요한 사색에 잠겨든다.

장소 원주시 부론면 정산 3리 189│전화 033-742-2111

기억을 머금은 시간 속으로 떠나는 여정

 

웅장한 건축미를 만날 수도 없고 화려한 역사를 확인할 수도 없는 폐사지. 하지만 황량한 벌판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탑과 주춧돌을 더듬고, 풀밭으로 변한 넓은 절터를 거닐다 보면 그곳을 가득 채웠던 천년 전의 이야기에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폐사의 아픔, 1,000년의 세월을 버텨온 노거수(巨樹)가 품었을 기억들, 오래된 흔적만 남은 그곳에 오래전 이야기들이 남아 아른거린다.


바람만 황량한 빈 터를 스치고 지나가지만, 깊어가는 계절의 고즈넉한 정취를 만끽하기에는 충분하다.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떠난 여행이 아니라 스산함을 달래려 들른 길에서 만난 폐사지는 그 어떤 명승지보다도 진한 여운으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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