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스러운 산, 그 정상에 서다
치악산 비로봉
한 선비가 구렁이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놓인 꿩을 구해준다. 그날 밤 앙갚음하러 찾아온 구렁이는 선비에게 ‘날이 밝을 때까지 종각의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주겠다’고 내기를 걸었다. 날이 밝기 전. 꿩 3마리가 종을 울리며 선비의 목숨을 구했다. 붉은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리다가, 꿩(雉)의 보은 설화로 치악산(雉岳山)으로 바뀌었다. 특별한 이야기가 담긴 원주 대표 자연 명소, 치악산으로 떠나본다.
울창한 숲길로 들어서자 나무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싱그럽다. 기다렸다는듯 하늘 향해 솟구친 나뭇가지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슬며시 내려 앉는다. 조선시대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인 동악단(東岳壇)이 자리할 정도로 예부터 기운이 영험한 산으로 알려진 치악산. 그런 연원이 있어서일까. 숲길을 걷는 내내 맑고 청정한 공기가 가득 느껴진다.
원주를 대표하는 치악산은 태백산맥의 오대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진 차령산맥의 줄기다. 남북으로 뻗은 능선들 사이사이 깊은 계곡을 이루며 기암괴석과 울창한 산림이 천하절경을 이루어 옛부터 동악 명산으로 꼽혔다. 주봉인 비로봉(1,288m)을 중심으로 남으로 향로봉 (1,043m), 북으로 매화산(1,084m), 삼봉(1,073m) 등의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남북으로 웅장한 산군을 형성하고 있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 여름철에는 구룡사의 울창한 송림과 깨끗한 물이 볼만하고, 가을에는 본래 적악산으로 불릴만큼 붉은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겨울의 설경 또한 장관을 이룬다. 풍성한 숲은 동식물의 보고로 불릴만큼 청정 자연이 우거져 있다.
빼어난 산세가 아름답지만, 험하기로도 이름이 높다. ‘치가 떨리고 악에 받친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니 마음 단단히 먹고 발길을 재촉한다. 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다리병창을 지나는 구룡사~비로봉 코스를 올라본다. 구룡사 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왼쪽 둔덕에 ‘황장금표(黃腸禁標)’라 쓰인 돌이 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전용 목재인 황장목(금강소나무)을 함부로 베어 가지 말라는 경고다. 계곡 옆으로 낸 탐방로의 이름도 황장목숲길이다.
세렴폭포까지는 완만해 타박타박 걸을만 하다. 세렴폭포는 높지 않지만 2단으로 휘어져 쏟아지는 물줄기가 운치를 더한다. 세렴폭포 갈림길에서 다리를 건너 비로봉 계곡로를 따라 다시 150m 정도 올라가면 칠석폭포가 있다. 길가의 들풀과 촘촘히 드리운 그늘 속 나뭇잎에도 가느다란 빛살이 연신 그림자를 드리우는 풍경화는 아름답지만. 걷기는 무척이나 힘들다. 잠시 느슨해진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제 악명 높은 사다리병창으로 들어선다. ‘사다리처럼 깎아지른 벼랑’이라는 곳이다. 처음부터 기나긴 데크계단이 이어진다. 돌계단, 통나무계단, 철계단 등 계단의 연속이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힘들었던 순간들을 지나고. 말등바위 전망대에 이르자 넓게 펼쳐지는 능선들의 그림같은 풍경에 피로마저 녹아내리는 듯하다. 마지막 데크계단을 오르면 비로봉 돌탑과 만난다. 비로봉은 산 모양이 시루와 같다 하여 일명 시루봉이라고도 하는데, 원주 제4경으로 꼽히는 비경이 선물처럼 펼쳐진다.
비로봉에는 돌로 쌓은 3개의 돌탑이 있다. 남쪽에 있는 탑은 ‘용왕탑’, 중앙에 있는 탑은 ‘산신탑’, 북쪽에 있는 탑은 ‘칠성탑’이다. 이 탑은 원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용창중(용진수)이란 분이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1962년부터 3년 만에 혼자 탑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영기가 깃든 산 정상에서 만난 신비로운 돌탑 앞에 두 손 모아 염원을 더해본다. 겹겹이 늘어선 능선들이 펼쳐진 수묵화에 눈을 돌리자 켜켜이 쌓인 마음의 더께도 하얗게 지워지는 것 같다.
가파른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치악산을 속 깊이 만날 수 있는 또다른 방법도 있다. 여유롭게 치악산 곳곳의 절경과 명소, 유서깊은 사찰 등을 돌아보며 정취를 즐길 수 있는 치악산 둘레길이다. 139.2km 길이의 치악산 둘레길은 총 11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1코스 꽃밭머리 길과 11코스 한가터 길이 특히 인기가 높다. 원주혁신도시와 인접한 데다, 평탄하고 아름다운 능선과 계곡을 함께 즐길 수 있고 잣나무와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아름답다. 1코스와 11코스는 이어진다.
2코스 구룡길은 치악산 주봉인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탐방로와 연결된다. 9코스는 길가에 늘어선 자작나무가 치악산 숲의 운치를 더하며, 10코스 아흔아홉골길은 낙엽송이 군락을 이뤄,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낙엽송과 붉은 단풍이 멋지게 어울린다.
붉게 물든 적악산의 아름다움을 둘레길에서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
눈 덮힌 겨울산이 멋집니다! 기회가 된다면 올겨울 비로봉에 다녀와보고 싶네요.